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어 아도르노 (문단 편집) == 여담 == * 아도르노는 젊었을 때 자신보다 11살 연상인 [[발터 벤야민]]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벤야민을 정말로 자주, 적어도 매주 한 번은 만났고,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살던 시기에는 아마도 더 자주 만난 것 같다"고 아도르노는 나중에 그가 크라카우어를 통해 벤야민을 알게 된 1923년 이후의 시기에 대해 썼다. "나중에도 정기적으로 그가 이곳을 방문할 때뿐만이 아니라 베를린에서도 그를 자주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새파란 젊은 나이였고, 그는 나보다 11살이 많았다. 나는 스스로를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그의 말을 경청했으며, 그에게 상세한 것들을 묻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더불어 그가 내게 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원고들도 보았다."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아도르노, 사유의 모티브들』 한상원 옮김, 에디투스, 2020, p.14~15)] 이 둘은 서로에게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를 남겼다.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생각,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구상들에서부터 개인사적 이야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넘나들면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아도르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벤야민을 극히 아꼈다. 1939년에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 당국은 독일어권의 망명자들을 모조리 수용소로 몰아넣었는데, 이 때 벤야민도 수용소에 갇혀버렸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아도르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호르크하이머]]를 닦달해서 벤야민에게 긴급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고는 벤야민이 [[뉴욕]]에 오면 살게 될 집을 보러다니던 참이었다. 하지만 1940년 10월, 아도르노는 친구 구를란트[* 나중에 [[에리히 프롬]]과 결혼한다.]에게서 벤야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12시간만 더 버텼다면 탈출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그는 벤야민이 죽음으로서 "철학에서 최고의 것이, 철학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상실되었다고" 한탄했다.[* 이순예 『아도르노 : 현실이 이론보다 엄정하다』 한길사, 2015, p.44] * 미국 망명 중이었을 때 [[할리우드]] 근처에서 살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 [[토마스 만]]이 이웃이었다. 토마스 만이 『파우스트 박사』라는 작품을 쓸 때, 아도르노는 이 저명한 소설가에게 음악학 강의를 해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했다. 토마스 만은 감사의 표시로 8장에서 '비젠그룬트(Wiesengrund)'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물론 이 단어는 미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아도르노의 성(姓)이다. 아도르노는 훗날 미국 망명기에 가장 좋았던 일로 토마스 만과 교류했던 것을 꼽았다. * 젊은 시절 [[아르놀트 쇤베르크|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에게 음악을 배운 적 있었는데, 그때 아도르노는 12음조 체계를 사용한 쇤베르크의 음악세계에 푹 빠졌었다. 아도르노의 음악을 들어보면 쇤베르크와 스타일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아도르노의 음악은 거기서 우울함이 더 느껴진다. 재밌는 것은 미국 망명시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와 이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이 만난 것 같지는 않다.[* 아도르노에 관한 수 권의 책에서 만났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검색을 해도 마찬가지.] * [[재즈]]를 싫어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도르노는 재즈가 독일 상류층의 오락과 같은 것으로서 "살롱음악과 행군음악(행진곡)을 섞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롱음악은 사회적 환영에 불과하고 행군음악은 허구적인 공동체를 가리키므로, 재즈에 흑인의 저항의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예제에 대한 반란의 표현이 아니라, 백인 관객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흑인 음악가의 분노에 가득찬 복종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재즈는 자신의 나약함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에, 재즈의 섹스어필은 권위에 반발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 나약함으로 권위에 대한 복종에 기여한다는 것.[* 지나친 해석이긴 하지만 아도르노가 추구하는 음악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만도 하다. 아도르노의 음악은 그 유대인 탄압의 시대를 반영하는 듯 우울한데다 불협화음까지 있어 기괴하게 들리는데, 이를 세련된 재즈와 비교한다면 재즈는 허영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영국 망명 시기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영국에 있었는데, 아쉽게도 둘은 만나지는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기질과 아도르노의 성마른 성격을 고려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변증법적 방법에 관심이 없었고, 아도르노는 영국철학의 실증주의를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도르노는 영국망명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는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두 사람은 매우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정의 철학에 대한 감수성, 문화적 우상타파주의와 비관주의를 공유했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의 기질과 아도르노의 성마른 성격을 고려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변증법적 방법에 관심이 없었고, 아도르노는 영국철학의 실증주의를 경멸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으리라."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82)] * 아도르노는 1964년 『본래성의 은어』에서, [[마르틴 하이데거|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 철학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개별 철학자들은 '불안'이나 '도약' 등과 같은 용어로 짐짓 광희를 만들어내어 그 속에 편안히 몸을 숨긴 채, 시대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그것은 주관적 내면성에서 지원군을 얻으려고 하는 망상적 경향이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65 참조. (이 책에서는 『진정성의 은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하이데거의 '본래성(Eigentlichkeit)'을 저격하는 책이므로, 『본래성의 은어』로 번역해야 한다.)] * [[칼 포퍼]]와 싸운 적이 있다. 시비는 칼 포퍼가 먼저 걸었다. 1961년 튀빙겐에서 열린 독일사회학회 개회연설에서 칼 포퍼는 27개의 테제를 제시하면서, 아도르노에게 자신의 테제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결정하라고 촉구하였다. 포퍼는 서구의 '열린사회'에서만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진리 추구가 가능하고 이로 인해 자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도르노는 과학적 진리 추구가 그것 자체만으로는 '과학이 어떤 목적에 사용되는지'를 묻지 않기 때문에 '비자유의 조건'에 연루된다고 보았다. 과학이 일종의 시장이어서 지적인 경쟁과 상호비판 덕택에 가장 최악의 가설들을 걸러낸다는 포퍼의 주장은, 정작 현실에서 '과학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를 상대할 때에는 작동되지 않았다. 나치는 과학을 내세워 인종청소를 했지만, 그 권위주의에 과학은 조용히 순응했다. 그래서 과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다. * 아도르노는 [[찰리 채플린]]를 만난 적이 있다. 채플린을 위해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채플린의 새 영화 〈무슈 베르두〉의 비공식 상영에 초대받았는데, 이어지는 저녁모임에서 아도르노가 피아노를 쳤던 것. 그 후 채플린도 보답으로 아도르노의 음악을 패러디 연주했다. 재밌는 것은, 아도르노는 자신의 책 『계몽의 변증법』에서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깐다는 것이다. 물론 채플린이 그 내용을 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26 참조.] [각주] [[분류:독일의 현대 철학자]][[분류:독일의 사회학자]][[분류:음악 평론가]][[분류:유대계 독일인]][[분류:1903년 출생]][[분류:1969년 사망]][[분류:프랑크푸르트 출신 인물]][[분류:프랑크푸르트 학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